화려한 전통시장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
오늘날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다양한 먹거리와 한복, 원단상점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화려한 시장의 전면에만 주목한 나머지, 이곳의 뒷골목이 한때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하고 회합하던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광장시장의 진짜 이야기는 그 화려함 뒤편, 좁고 음습한 골목에서 시작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부터 조선 전역에는 항일 의식이 강해졌고, 서울은 그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뒤 식민 통치를 강화하면서 감시망을 서울 시내 구석구석에 펼쳤고,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공개적인 공간이 아니라 익명성이 높은 장소를 선택해 모임과 전달, 전략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광장시장 주변은 바로 그러한 ‘가려진 공간’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복잡한 상점 구조와 사람의 왕래, 그리고 외부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상업 공간의 혼잡함은 오히려 비밀스러운 활동을 감추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국내 망명지’로서의 광장시장 뒷골목
광장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05년 이후입니다. 기존 종로 4가 일대의 남대문 상권이 일본 상인에게 장악당하면서, 조선 상인들이 대항적으로 만든 자립형 민족시장이 광장시장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 아니라, 문화적·정치적 저항의 성격이 짙은 공간 형성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상인과 장인들은 일본의 물자 통제에 반발해 자체적인 유통망을 구축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되어 물자 은닉, 은밀한 자금 이동, 은신처 제공 등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광장시장 북쪽 뒷골목은 공식적인 기록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일제 경찰이 자주 단속했던 '치안 불량 지대'로 언급됩니다. 이는 곧 독립운동 관련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방증입니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조선청년독립단, 대한광복단, 상해 임시정부의 연락조직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의약품, 인쇄기, 자금 등을 전달하던 비밀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신문, 격문 등의 유통 역시 시장 골목에서 은밀히 이루어졌습니다.
시장의 익명성과 활동의 지속 가능성
독립운동가들은 항상 ‘드러나지 않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일제가 설치한 총독부, 경무국, 경찰서, 감시망의 중심이 종로, 중구 일대였기 때문에, 시장과 같은 혼잡한 공간은 이상적인 회합 장소이자 도피처였습니다. 특히 광장시장 뒷골목은 낮에는 시장 상인과 손님들로 붐볐고, 밤에는 장막을 내린 좁은 공간으로 바뀌며 이중적인 시간의 활용이 가능했던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에 광장시장 내 다다미방, 원단 상점의 창고, 포목점의 뒷방 등은 외부인이 들어가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었고, 수차례 단속을 피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한독자(韓獨者)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조직원들이 시장 골목의 이발소나 찻집에 모여 연락을 주고받은 기록이 구술자료나 일부 경찰 보고서에서 확인되며, 이를 통해 당시 시장 공간이 단순한 생계 기반이 아니라 도심 항일운동의 인프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장시장과 상인들의 연대
광장시장은 태생적으로 ‘자생적 민족 경제의 실험장’이었습니다. 일제의 경제 침탈에 반대하며 상인들 스스로 상권을 구축했고, 이는 상인들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유대는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의 지원 네트워크로 확장되었고, 일부 상인들은 물자와 공간을 제공하며 비공식적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시장은 일상적인 거래 속에서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장소였으며, 외지인과 내지인의 흐름, 계층 간 소통, 정보의 유통이라는 점에서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1920년대 이후에는 광복회 계열의 비밀연락소가 시장 내에 설치되었다는 증언도 있으며, 인쇄물을 포장지 사이에 숨겨 유통하거나, 의약품을 식자재 상자에 숨기는 방식으로 감시를 우회한 독립운동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시장에서 활동하던 일부 상인들은 이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거나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조직을 보호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대개 남지 않았지만, 광장시장의 구조 속에 그들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해방 이후, 기억되지 못한 공간
해방 이후 광장시장은 한국전쟁과 산업화, 그리고 IMF를 지나며 여러 번 위기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시장 뒷골목의 역사적 의미는 점점 잊혀졌습니다. 대부분의 공간은 리모델링되거나, 건물 구조가 바뀌며 항일운동의 흔적을 품고 있던 장소는 상업공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서울시는 근래 전통시장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광장시장에 대한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지만, 정작 시장의 뒷골목이 지닌 역사성은 거의 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서울 도심 속 항일운동 공간들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를 보여줍니다. 단지 ‘불편한 과거’로 치부하거나 ‘기록이 없어서’라는 이유로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은 도시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광장시장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살아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 스며든 독립운동의 흔적을 다시 발굴하고, 그 가치를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더욱 절실합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광장시장 뒷골목의 재발견
‘서울 숨은 역사 장소’라는 큰 주제 아래, 광장시장 뒷골목은 단순히 상업공간의 이면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민중과 독립운동가들의 생존의 전략이 깃든 공간으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시장은 늘 국가 권력이 놓치는 경계에 있었고, 그 틈을 활용해 수많은 비공식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장시장 뒷골목은 단지 장사꾼들의 공간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조용한 전쟁’을 치르던 사람들의 무대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무대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끌어내고 기억하는 일입니다. 상점 간판 뒤, 오래된 창고 벽, 바닥의 패인 돌틈. 그 어느 곳에도 당시의 흔적은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진정한 서울의 역사 탐방이란, 잘 알려진 유적지를 넘어 이러한 ‘숨은 지층’을 발견해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광장시장 뒷골목은 바로 그 출발점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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