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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빙고터, 얼음을 지키던 조선의 냉장 창고 유적

한강변에 묻힌 유산, 조선의 얼음 창고 ‘서빙고터’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대교 아래로 이어지는 자전거길과 산책로 인근에는 ‘서빙고’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시민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서빙고’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고 관리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당시 국가 제도 안에 편입된 왕실 전용 냉장 보관소였습니다. 지금은 일부 유적만이 복원되어 자그마한 공원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조선의 과학기술, 궁중 문화, 물류 체계, 계절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 이곳은 분명히 ‘서울의 숨은 역사 장소’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그저 오래된 지명일 수 있지만, 이 공간은 한양 도시 운영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으며, 조선이 얼마나 정교..

서울 구 벽수산 탄약고 터, 냉전의 기억이 스며든 은평의 뒷산

은평구 벽수산 자락, 낯선 철문이 지닌 군사 유산의 흔적서울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의 경계에 자리한 벽수산은,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의외로 조용하고 사람의 발길이 뜸한 뒷산 중 하나입니다. 이 산을 따라 걷다 보면, 다른 산들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녹슨 철문, 콘크리트 구조물, 잡풀 속에 숨은 울타리 등 일상적인 등산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흔적들입니다. 겉보기에는 오래된 창고 같지만, 이곳은 한때 군사적으로 철저히 통제되었던 구 벽수산 탄약고 터입니다. 지도상에도 표기되지 않았던 이 시설은, 한국전쟁 이후 냉전기의 긴장 속에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군사시설 중 하나였습니다. 오랫동안 비공개 지역으로 남아 있었던 탓에, 주민들에게조차 존재 이유와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은..

절두산 순교성지, 한강변에서 지켜낸 신앙과 피의 기억

한강 너머 절벽 위, 잊히지 않는 고통의 흔적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평범한 도시 풍경 사이로 뾰족한 첨탑 하나가 조용히 솟아 있습니다. 여기는 절두산 순교성지, 조선 후기의 박해사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오늘날에는 성당과 순교자 기념관,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어 신자들이나 역사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드물지 않지만, 서울의 수많은 역사 공간 중에서도 이처럼 깊고 조용한 상처를 품은 장소는 많지 않습니다. ‘절두산(切頭山)’이라는 명칭부터가 비극을 내포합니다. 이름 그대로 ‘목이 잘리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이 지명은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된 장소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한강 절벽 위라는 위치는 신자들의 마지막 길이었고, 도시의 ..

낙원동 악기골목, 음악과 저항이 공존하던 도시의 또 다른 지하실

단순한 악기상가가 아닌 문화적 교차점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낙원상가’는 흔히 악기 상가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곳을 찾으면 건반, 기타, 관악기, 전통악기까지 모든 악기를 만나볼 수 있으며, 음악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서울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단지 악기를 사고파는 시장의 기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1969년 준공된 낙원상가는 그 자체로 문화 공간의 실험장이자, 예술과 저항이 교차하던 장소였습니다. 지하에는 연습실과 작업실이 밀집했고, 상가 외부에는 작곡가, 연주자, 제작자, 심지어 당시의 저항적 젊은 예술가들까지 드나들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 혼재하던 ‘문화의 충돌지대’였습니다.지금은 상가로서만 기억되..

서울 성북동 오패산 자락, 좌우 지식인들이 은신했던 문화사회의 쉼터

조용한 산자락에 깃든 ‘지식인의 은둔처’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오패산은 오늘날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은 소박한 산입니다. 낙산과 북악산을 잇는 이 야트막한 산은,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아 도심 속 자연공간처럼 느껴지지만, 이곳은 과거 지식인과 예술인, 종교인들이 은밀히 모여 사유하고 창작하던 서울 지성사의 숨겨진 거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 오패산 자락은 단순한 은신처 그 이상이었습니다.서울 도심에서 살짝 비껴난 성북동 일대는 행정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던 도시의 가장자리였습니다. 1930년대부터 이곳에는 검열을 피해온 언론인, 문인, 학자, 종교인 등이 조용히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활동을 공식적으로 이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 지식의 끈을 이어..

혜화동 예수성심신학교, 일제의 감시 속 민족 교육의 거점이었던 성소의 공간

북촌 끝자락, 신학교의 침묵 속에서 피어난 의지서울 종로구 혜화동, 번화한 대학로와 낙산 사이에 자리한 예수성심신학교는 오랜 시간 동안 일반 시민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공간입니다. 지금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명칭 아래 조용히 기능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단순한 종교 교육시설을 넘어 서울 한복판에서 민족성과 지식의 맥을 이으려는 저항의 거점이자 교육의 최후 보루였습니다.이 학교는 1931년, 경성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노기량 주교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성직자 양성을 주목적으로 했지만, 시대 상황은 그 목적을 훨씬 더 넓게 만들었습니다. 신앙과 학문을 동시에 담아내는 공간이었던 예수성심신학교는 조선인 신학생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닌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

광장시장 뒷골목,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회합지였던 생존의 거리

화려한 전통시장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오늘날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다양한 먹거리와 한복, 원단상점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화려한 시장의 전면에만 주목한 나머지, 이곳의 뒷골목이 한때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하고 회합하던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광장시장의 진짜 이야기는 그 화려함 뒤편, 좁고 음습한 골목에서 시작됩니다.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부터 조선 전역에는 항일 의식이 강해졌고, 서울은 그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뒤 식민 통치를 강화하면서 감시망을 서울 시내 구석구석에 펼쳤고,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공개적인 공간이 아니라 익명성이 높은 장소를 선택해 모임과 전달, 전략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광장시장 주변은 ..

서울 옥인동 우물골, 조선 수도의 생활수 공급지와 터전의 기억

조선의 수도, 물을 찾아 터를 잡다서울 종로구 옥인동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과 맞닿은 서촌 한복판에 자리한 작은 동네입니다. 지금은 고즈넉한 한옥과 카페, 갤러리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로 인식되지만, 조선시대 이곳은 서울 시민들이 생존을 위해 찾아오던 '물의 마을'이었습니다. ‘옥인(玉仁)’이라는 이름 자체가 맑고 귀한 물에서 유래되었으며, 실제로 이 지역에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가 흐르던 골짜기와 샘터들이 곳곳에 분포해 있었습니다.당시 한양은 하천이 도시 중심을 가로지르긴 했지만, 마시는 물과 생활용수는 별도로 관리되어야 했습니다. 강물은 수질이 불안정했고, 음용수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물이나 약수터, 계곡수를 중심으로 생활권을 형성했습니다. 옥인동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풍..

서울 한강진역과 미군기지, 분단과 냉전의 도시 흔적

도심 속 경계 공간, 전쟁이 남긴 무형의 지층서울 한강진 일대는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복합적 공간입니다. 지도상으로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요지이며, 도심 접근성이 뛰어난 지역이지만, 이곳이 겪어온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이 일대는 서울의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경계가 생기고, 일상과는 동떨어진 도시 기능이 이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한강진역과 미군기지가 있었습니다.이 지역은 원래 한양 도성의 외곽이자 농촌에 가까운 성저마을의 성격을 지녔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 교통의 도입과 함께 서서히 도시화가 진행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분단 체제가 고착화되자, 서울은 정치·군사적으로 재편되었고, ..

서울 신교동 가옥, 일제강점기 민간 건축의 살아 있는 표본

도심 한복판에 남겨진 살아 있는 근대 유산서울 종로구 신교동 골목 어귀,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유독 낮고 기와 얹힌 한옥 한 채가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에 지어진 이 가옥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보존 상태가 우수한 민간 근대한옥으로, 21세기 도심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희귀한 유산입니다. 이 집은 과거 한양 도성 외곽에서 시작된 도시 확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서울의 생활 문화와 도시 변천사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입니다.일반적으로 서울의 일제강점기 유산이라 하면 정부청사, 관공서, 철도역처럼 국가나 식민권력과 연결된 건물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신교동 가옥은 그와는 결이 다릅니다. 이곳은 당시 민간 중산층 혹은 부유층 가정의 생활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