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서울의 첫 외교지구, 정동의 시작점
서울 중구 정동 일대는 근대 서울의 외교·문화 중심지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궁궐 축선에서 살짝 벗어난 이 정동은 조선 말기부터 외세와의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외국 공사관, 선교사 주택, 신문사, 학교, 병원 등이 밀집한 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동극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동극장만 기억하고, 그 옆 골목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동극장 옆 골목, 그러니까 지금의 배재학당역사박물관과 구 러시아 공사관터로 이어지는 작은 길목은 조선이 근대 문명과 처음으로 조우했던 결정적인 현장입니다.
이 골목은 단순한 뒷길이 아닙니다. 조선 말기 외국 사절단이 덕수궁을 방문하고 다시 공사관으로 이동하던 외교 동선이었으며,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 활동을 전개하던 통로이자, 신문과 신학교육이 처음 시작된 장소입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지만, 수많은 역사적 교차점이 응축되어 있는 곳입니다.
조선 말기의 외교 격전지, 정동 골목의 이면
19세기 후반, 조선은 청과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외국 공사관들이 하나둘 정동 일대로 입지하게 되면서 정동 골목은 실질적인 외교 지구로 자리 잡게 됩니다. 특히 구 러시아 공사관은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1년간 머물렀던 장소로, 조선 외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공간이었습니다.
정동극장 옆 골목은 바로 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주요 길목이었고, 이 골목을 중심으로 미국 공사관, 영국영사관, 독일 영사관 등의 주요 외교 시설이 집중되었습니다. 이런 공간 구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동이 덕수궁과 가까우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은 조선 왕실의 중심지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곳에 주둔지를 설정했고, 그 결과 이 골목은 외교와 정치의 길목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정동은 외교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외국 공사관에서 벌어진 밀담이나 비공식 접견이 조선의 개화 정책과 내부 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정동극장 옆 골목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라, 외교와 정치의 중추 신경처럼 작동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재학당과 정동 골목의 교육 문화 유산
정동극장 바로 옆에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의 옛터이며,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고등교육이 처음 실시된 장소입니다. 배재학당은 개화기 조선의 신교육을 상징하는 학교로, 한글과 영어, 수학, 역사 등 실용적인 과목을 중심으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 배재학당이 정동골목에 자리 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외국 공사관과의 근접성, 덕수궁과의 연결성, 그리고 주변에 선교사 주택이 밀집해 있던 공간적 조건은 배재학당이 ‘근대 교육의 거점’이 되기 위한 최적의 입지였습니다. 이 골목은 단지 학교 주변이 아니라, 조선 청년들이 처음으로 근대 문명과 마주한 통로이자 지식이 유입된 경로였습니다.
지금도 이 골목에는 당시 배재학당의 건축 일부가 복원되어 있으며, 좁은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19세기 후반의 서울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비록 상업화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주목받지 않지만, 그만큼 원형이 잘 보존된 서울의 숨어 있는 역사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동극장과 문화 개화의 상징
정동극장은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이 설립한 ‘원각사’를 전신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여러 차례 명칭과 용도가 바뀌다가 1995년 재개관하며 현재의 정동극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극장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동극장은 근대 서울에서 처음으로 ‘연극’과 ‘무대 예술’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장소이며, 당시 공연은 궁중 무용, 민속극, 외국인 음악 공연 등 매우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골목의 극장과 학교, 공사관은 단절된 별개의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정동극장에서 열린 공연에는 외국 외교관들과 그 가족, 배재학당 학생, 선교사, 그리고 개화파 지식인들이 함께 어울리며 조선 사회가 서구 문화를 어떻게 수용해가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장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좁은 골목은 교육, 외교, 예술이 한 공간 안에서 연결된 복합 문화지구였던 셈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정동극장만을 방문하면, 이 장소가 지닌 역사적 함의를 놓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와 정동 골목의 변화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정동 골목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겪습니다. 외국 공사관 일부는 일본 통치 당국에 흡수되거나 기능이 정지되었고, 배재학당과 같은 선교계 교육기관은 감시와 통제 아래 놓이게 됩니다. 정동극장은 일본식 연극이나 가부키 공연 장소로 전용되기도 했으며, 기존의 문화 자산은 일본 제국주의적 문화 정책에 따라 변질되거나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정동 골목의 골격은 1930년대 도시계획에 따라 일부 도로가 정비되며 기존의 경로와 구조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당시 도심 재개발은 의도적으로 외국 선교사 구역과 조선 근대교육 시설을 분산시켜 식민지 지배 질서에 맞는 공간 배치를 유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정동의 정체성은 점차 흐릿해졌고, 광복 이후에도 이 지역은 정부 기관, 종교단체, 교육기관 등이 혼재된 중성적 공간으로 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동극장 옆 골목은 서울의 역사에서 ‘기억의 공백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공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정동 골목, 그리고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의 의미
오늘날 정동극장 옆 골목은 조용한 산책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은 서울이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외교, 교육, 문화의 전선이 교차하던 장소였습니다.
서울에는 수많은 화려한 명소가 있지만, 정동극장 옆 골목처럼 근대사의 실제 장면이 응축된 장소는 많지 않습니다. 도로명 주소와 지번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이 골목의 숨은 흔적들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살아 있는 기록입니다.
지금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잔재를 스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근대를 수용하던 방식과 그 속에서 형성된 문화·교육·외교의 흐름을 몸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서울의 도심 속에서 사라져가는 역사성을 되살리고자 한다면, 정동극장 옆 골목처럼 작지만 깊이 있는 장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골목은 단순히 ‘옛날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외부 문명과 조우하고, 이를 내면화하며 성장해왔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골목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하나의 주인공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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