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의 선을 따라 이어진 이화동의 길
서울 한복판에서 성곽과 일상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이화동과 낙산 일대는 도시와 역사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공간으로,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서울이라는 도시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화동은 종로구 동쪽에 위치한 동네로, 낙산 자락을 따라 이어진 골목과 계단길, 그리고 성곽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단순히 풍경이 아름답고 예술적 감성이 깃든 마을이라는 이유로만 주목받아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화동은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의 동쪽 방어선의 일부로, 낙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산세와 성곽의 흐름이 도성의 동벽을 구성하며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습니다. 특히, 이화동에서부터 시작되는 낙산 성곽길은 북쪽의 흥인지문(동대문)과 남쪽의 혜화문을 잇는 중간 지점으로, 한양 도성 방어 체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바뀌고, 기억은 쉽게 흐려집니다. 현대 도시 서울 속에서 이화동의 전략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는 점차 가려졌고, 지금은 ‘이화 벽화마을’이라는 관광지 이미지에 덮여 그 본래의 맥락을 잃어가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낙산 자락의 원래 기능, 조선의 성곽 도시로서의 서울, 그리고 이화동과 낙산이 담고 있는 역사적 단서를 다시 복원해 보고자 합니다.
낙산의 지형과 조선의 방어 전략
낙산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과 함께 한양 도성의 외곽을 형성하는 네 개의 주요 산 중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지키는 중심적인 산지였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면서 도성의 방어를 위해 네 산을 기준으로 성곽을 쌓았는데, 그중 낙산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가진 산으로, 침입자의 진입이 쉬운 지형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낙산 일대는 다른 세 산에 비해 더 치밀한 방어시설이 필요했고, 이화동은 그 하부 거점으로써 성곽 수비의 중요한 지점이 되었습니다.
성곽의 구조를 보면, 낙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성벽은 단순히 돌을 쌓은 벽이 아니라, 군사적 거점이 될 수 있도록 곳곳에 포루(砲樓)와 성문, 암문 등을 설치했습니다. 낙산 성곽길 중 이화동과 연결되는 구간은 특히 외부 침입자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성 안팎의 왕래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일대에 훈련도감 부속 초소도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성곽 보강 공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구간이기도 합니다.
지형상 서울 도성의 동벽은 다른 지역보다 낮기 때문에, 당시 군사 전략가들은 이곳에 보다 많은 병력을 배치하거나 감시 장치를 두는 방식으로 방어력을 보완했습니다. 지금 이화동 벽화마을 위로 올라가면 성곽 일부가 복원된 형태로 보이는데, 그 구조를 보면 완만한 경사 위에 여러 겹의 방어 라인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성이 바로 당시 한양 도성의 특수한 방어 체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시기의 훼손과 도시 구조의 변화
그러나 낙산과 이화동이 가진 역사적 가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급격히 훼손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도성 외곽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공간 재편을 시도했는데, 그 일환으로 성곽 일부를 철거하거나 군사용지, 관공서, 사택 등의 용도로 전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낙산 일대도 예외는 아니었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도성의 동쪽 경계였던 이화동 지역에 주택과 도로가 밀집되면서 원래의 성곽 구조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화동은 식민지 시기 중·하류층 주거지가 형성된 대표적인 공간으로, 좁은 골목과 계단, 다세대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며 ‘하층민의 언덕’이라는 인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 1970년대 도시 확장기까지 이화동은 도시 하부 구조 속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속에 묻혀 있던 조선의 성곽 흔적도 잊혀져 갔습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낙산 일대에 ‘이화여자고등학교’ 등 교육시설이 들어서면서, 군사 방어 거점이었던 공간은 도시의 교육지구로 전환되었고, 기존의 역사적 기능은 도로·학교·주택지에 덮여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화동과 낙산은 역사와 단절된 도시 공간으로 재구성되었으며, 이 또한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기억해야 할 지점입니다.
이화 벽화마을로 가려진 과거의 흔적
최근 이화동은 ‘이화 벽화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골목마다 그려진 벽화와 예술 작품, 그리고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뷰포인트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죠. 하지만 이러한 관광화는 오히려 이 지역이 지닌 본래의 역사성과 공간 기억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실제로 벽화가 그려진 골목 중 다수는 과거 성곽과 연결되는 감시용 통로 혹은 암문이 있던 위치였으며, 낙산 성벽 아래 흐르는 길목은 군사적 작전 통로로 기능하던 곳이었습니다. 현재 그 위에 놓인 벽화와 안내 표지판 중 상당수는 이러한 맥락을 거의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성곽의 역사적 배경은 관광 콘텐츠의 부속물로만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주민과 관광객 사이의 마찰, 도시재생사업 이후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등도 이화동이라는 장소를 단순히 '예쁜 골목'으로 소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것은 이 지역이 단순한 예술마을이 아니라, 서울 도성의 일부였고, 도시의 전략적 중추 역할을 했던 공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곽 복원 사업과 도시 기억의 회복
서울시는 2000년대 이후 한양도성 복원사업을 본격화하면서, 낙산 성곽도 일부 구간에서 복원·정비를 진행하였습니다. 현재 이화동 위쪽의 낙산공원 일대에서는 성벽이 일정 부분 원형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고, 도보길과 함께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복원된 성곽은 대부분 상단부에 집중되어 있고, 이화동 골목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하부 지역은 여전히 일반 주거지로 남아 있어 그 연계성이 다소 부족한 상태입니다.
도시의 역사 복원이란 단순히 성벽을 복원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성곽과 연결되어 있었던 골목, 담장, 계단, 대문, 암문, 통로 같은 미시적 공간 구조를 함께 살펴보고 복원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역사 공간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이화동은 지금도 그 지형 구조 자체가 조선 시대 성곽의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건물은 바뀌었어도 골목의 흐름이나 계단의 방향, 담장의 모양 등은 여전히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화동을 ‘서울의 숨은 역사 장소’로 소개할 때, 단순히 성곽이 있다는 사실보다 성곽이 도시 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입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이화동과 낙산의 가치
이화동과 낙산 일대는 단지 관광지나 주거지가 아닙니다. 이곳은 조선의 방어 전략, 일제의 도시 재편, 해방 이후의 도시 확장, 그리고 최근의 도시재생까지 겹겹이 쌓인 서울 도시사의 입체적인 현장입니다. 성곽이라는 물리적 구조물은 사라지거나 복원되었지만, 그 위에 덧씌워진 사회적·정치적 맥락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관광객들은 벽화마을을 지나고, 주민들은 일상 속에서 낙산을 오르내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발길 아래에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기억을 선택하며, 어떤 흔적을 지우거나 남겨왔는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화동을 '숨은 역사 장소'로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잊혀졌더라도, 그 공간은 여전히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연결해내야 합니다. 이화동은 단지 낙산의 자락이 아닌,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 그 자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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