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안에서만 서울의 역사를 볼 수 있을까요?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 하면 보통 경복궁이나 창덕궁, 또는 종묘와 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도성 내부의 화려한 궁궐이나 성곽만이 서울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였던 한양은 성문 안보다 오히려 성문 밖에서 더 활발히 기능했던 삶의 공간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대문 중 동쪽의 흥인지문 바깥은 지금까지도 ‘중심지에서 조금 비껴난’ 곳으로 여겨지며, 역사 속 기억에서조차 소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지역은 단순히 도성 밖의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흔적, 근대 도시계획의 실험장, 그리고 지금도 남아 있는 생활 공동체의 맥락까지. 흥인지문 바깥은 도심 속에서 시간이 겹겹이 축적된 역사적 지층이며, ‘서울 숨은 역사 장소’라는 블로그 주제에 꼭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흥인지문의 건립 배경과 건축적 특징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 한양 도성과 함께 건설된 사대문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 정문 역할을 했습니다. ‘흥인지(興仁之門)’라는 이름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 동쪽이 만물이 태어나는 방향이라는 유교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흥인지문은 보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보는 건 1869년 고종 때의 중수(重修) 형태입니다. 원래의 건축은 왜구 침입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수차례 파괴와 복원을 반복했으며, 현재의 모습은 흙과 돌로 쌓은 성벽 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중층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흥인지문은 방어적 목적을 고려하여 반달형 옹성(甕城)을 설치했고, 바깥에서 성문을 바로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 옹성은 동대문이라는 장소가 단지 교통로가 아니라 방어, 통제, 출입 감시의 기능까지 갖춘 도시 접점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흥인지문 바깥, 왕십리로 이어진 생활의 길목
성문 바깥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성저십리(城底十里)’로 분류되어 세금과 신분 통제가 덜했고, 따라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특히 흥인지문 바깥은 왕십리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한양과 경기 북동부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 노선 역할을 했습니다.
왕십리는 한양 도성에서 약 10리 떨어진 지점으로, 역원(驛院)과 말 관련 시설이 있었던 교통 결절지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평민 상인, 농민, 공예인들이 이 일대에 정착했고, 성문 밖이지만 도시 기능의 확장된 공간으로서 활발히 작동했습니다.
특히 마장동(馬場洞)은 조선시대 국영 목장이 있던 곳으로, 국왕의 말과 군사용 말을 사육하던 지역입니다. 마장시장은 이후 축산물 도매시장으로 기능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단순히 전통시장의 역할을 넘어 서울 도시경제의 근간으로 성장해왔습니다.
황학동 일대는 광통교를 거쳐 청계천을 따라 이어지는 물길의 연장선으로, 과거에는 제재소, 철물점, 구로공단의 중간 가공처로 기능하며 근대 산업경제의 뿌리를 이룬 곳이기도 합니다. 즉, 흥인지문 바깥은 조선 후기부터 근대 초기까지 도성 내부로 공급되는 생필품, 인력, 정보의 집산지였던 셈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도시재편과 흥인지문 외곽의 변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경성을 일본식 도시로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흥인지문 바깥은 철도 건설과 근대 병원, 학교, 시장 등을 집중 배치하는 도시 실험지로 활용됐습니다.
경성역(현 서울역)에서 청량리역으로 이어지는 철도 축을 기준으로, 동쪽 일대에는 조선인 주거지와 전통시장, 일본인 상권이 명확히 분리되어 자리 잡았습니다. 흥인지문 인근에는 경성제국대학 부속의학부 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 전신)이 들어섰고, 이 일대는 공공의료와 위생관리의 모델 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발은 기존 마을과 공동체를 철거하거나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성곽도 그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도로 확장과 도시 미관 정비를 명분으로 흥인지문 인근 성곽 일부가 철거되었고, 그 결과 지금도 중간중간 단절된 성곽 구간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일제가 남긴 지도와 행정 문서를 보면, 흥인지문 외곽은 ‘혼합 구역(Mixed Zone)’으로 분류되며 전통과 근대, 조선과 일본, 도심과 외곽이 뒤섞인 불안정한 도시 경계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서울이 아닌 듯 서울인 지역’으로 간주되며, 도시계획에서 종종 소외되곤 했습니다.
동묘와 골동품 거리, 도시의 기억이 겹쳐 있는 곳
흥인지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동묘’라는 이름을 가진 역이 나오고, 그 앞에는 골동품 상점이 밀집한 독특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골목은 원래 조선시대 ‘의흥동’이라 불렸던 곳으로, 전통 제례와 군사 제도를 잇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묘 자체는 명나라 장수 ‘관우’를 기리는 관왕묘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상징하기 위해 세운 공간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군사적 의례가 치러졌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을 위한 골동품 상점과 수공업 장터가 형성되면서 혼성적인 역사 공간으로 진화했습니다.
지금은 중고 의류, 헌책방, 재활용품이 진열된 거리로만 보일 수 있지만, 이 거리의 진짜 가치는 수십 년간 서울 도시 변두리의 생존 경제와 생활 문화가 이어져왔다는 점에 있습니다.
서울시는 최근 동묘 일대를 ‘서울생활문화유산 지구’로 재정비하려는 노력을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이 지역은 개발 압력과 낙후 이미지 속에 불안정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 서울 속 흥인지문 바깥의 풍경과 과제
2000년대 이후 서울시는 흥인지문과 동대문 일대의 성곽 복원 및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조성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는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대의 과거 정체성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DDP 주변은 관광객과 상업 공간으로 채워졌고, 골목과 전통 상권은 주차장이나 고층 상가에 밀려 그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2020년대 들어 ‘한양도성 순성길’ 사업의 일환으로 흥인지문과 낙산,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구간의 성곽 잔존지를 복원하고 있으나, 시민의 접근성은 여전히 낮고 교육 콘텐츠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처럼 흥인지문 바깥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도시의 경계이자 공백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숨은 역사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의 결정적 가치
사대문 안의 역사 명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곽에 존재하던 삶과 공간, 기억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도시는 항상 내부가 아니라 외곽에서 성장해왔습니다. 성문 바깥은 도시의 확장과 변화를 가장 먼저 겪는 지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도시의 정체성과 미래를 결정하는 공간입니다.
흥인지문 바깥은 도시경계, 역사적 기억, 상업 발달, 사회 변화를 모두 겹겹이 담아낸 서울의 ‘살아 있는 역사 공간’입니다. 겉보기에 낡아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도시의 성장과 흔들림, 그리고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진정한 역사 콘텐츠는 박제된 유적지보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장소를 통해 도시의 흐름을 읽고 기록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흥인지문 바깥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외연이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경계선’이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숨은 역사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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