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

(49)
서울역 앞 옛 교통부 청사, 근대 행정의 무대에서 역사기록보관소로 변한 공간의 흔적 산업화의 시작을 지켜본 건물, 지금은 사라진 서울역 앞 옛 교통부 청사서울역 광장을 지나 남대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과거 한 건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철거되어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지만, 서울역 앞에는 한때 대한민국 교통 행정의 중심지였던 ‘옛 교통부 청사’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교통부의 초대 청사로 사용되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근대 행정 체계를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이 건물은 미군정청 산하의 운수국 청사로 사용되었다가, 곧 대한민국 정부의 교통부로 넘겨지면서 한국의 철도, 해운, 항공 정책을 총괄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오늘날 국토교통부로 발전한 기관의 전신이 바로 이 교통부..
경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의 마지막 거점이 된 서울의 저택 해방 후 혼란 속에 세워진 독립운동의 상징 공간1945년 8월,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해방은 곧바로 또 다른 혼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서울에서 머물며 활동 거점으로 삼았던 공간이 바로 ‘경교장’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단순한 숙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당시 임정의 서울 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이 이곳에서 머물며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생애 마지막을 마무리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경교장은 서울 종로구 평동 일대에 위치한 1930년대 양식의 2층 벽돌 건물로, 원래는 친일 자본가 최창학이 사적으로 건축한 대저택이었습..
서빙고터, 얼음을 지키던 조선의 냉장 창고 유적 한강변에 묻힌 유산, 조선의 얼음 창고 ‘서빙고터’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대교 아래로 이어지는 자전거길과 산책로 인근에는 ‘서빙고’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시민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서빙고’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고 관리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당시 국가 제도 안에 편입된 왕실 전용 냉장 보관소였습니다. 지금은 일부 유적만이 복원되어 자그마한 공원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조선의 과학기술, 궁중 문화, 물류 체계, 계절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 이곳은 분명히 ‘서울의 숨은 역사 장소’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그저 오래된 지명일 수 있지만, 이 공간은 한양 도시 운영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으며, 조선이 얼마나 정교..
서울 구 벽수산 탄약고 터, 냉전의 기억이 스며든 은평의 뒷산 은평구 벽수산 자락, 낯선 철문이 지닌 군사 유산의 흔적서울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의 경계에 자리한 벽수산은,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의외로 조용하고 사람의 발길이 뜸한 뒷산 중 하나입니다. 이 산을 따라 걷다 보면, 다른 산들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녹슨 철문, 콘크리트 구조물, 잡풀 속에 숨은 울타리 등 일상적인 등산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흔적들입니다. 겉보기에는 오래된 창고 같지만, 이곳은 한때 군사적으로 철저히 통제되었던 구 벽수산 탄약고 터입니다. 지도상에도 표기되지 않았던 이 시설은, 한국전쟁 이후 냉전기의 긴장 속에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군사시설 중 하나였습니다. 오랫동안 비공개 지역으로 남아 있었던 탓에, 주민들에게조차 존재 이유와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은..
절두산 순교성지, 한강변에서 지켜낸 신앙과 피의 기억 한강 너머 절벽 위, 잊히지 않는 고통의 흔적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평범한 도시 풍경 사이로 뾰족한 첨탑 하나가 조용히 솟아 있습니다. 여기는 절두산 순교성지, 조선 후기의 박해사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오늘날에는 성당과 순교자 기념관,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어 신자들이나 역사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드물지 않지만, 서울의 수많은 역사 공간 중에서도 이처럼 깊고 조용한 상처를 품은 장소는 많지 않습니다. ‘절두산(切頭山)’이라는 명칭부터가 비극을 내포합니다. 이름 그대로 ‘목이 잘리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이 지명은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된 장소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한강 절벽 위라는 위치는 신자들의 마지막 길이었고, 도시의 ..
낙원동 악기골목, 음악과 저항이 공존하던 도시의 또 다른 지하실 단순한 악기상가가 아닌 문화적 교차점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낙원상가’는 흔히 악기 상가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곳을 찾으면 건반, 기타, 관악기, 전통악기까지 모든 악기를 만나볼 수 있으며, 음악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서울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단지 악기를 사고파는 시장의 기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1969년 준공된 낙원상가는 그 자체로 문화 공간의 실험장이자, 예술과 저항이 교차하던 장소였습니다. 지하에는 연습실과 작업실이 밀집했고, 상가 외부에는 작곡가, 연주자, 제작자, 심지어 당시의 저항적 젊은 예술가들까지 드나들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 혼재하던 ‘문화의 충돌지대’였습니다.지금은 상가로서만 기억되..
서울 성북동 오패산 자락, 좌우 지식인들이 은신했던 문화사회의 쉼터 조용한 산자락에 깃든 ‘지식인의 은둔처’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오패산은 오늘날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은 소박한 산입니다. 낙산과 북악산을 잇는 이 야트막한 산은,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아 도심 속 자연공간처럼 느껴지지만, 이곳은 과거 지식인과 예술인, 종교인들이 은밀히 모여 사유하고 창작하던 서울 지성사의 숨겨진 거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 오패산 자락은 단순한 은신처 그 이상이었습니다.서울 도심에서 살짝 비껴난 성북동 일대는 행정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던 도시의 가장자리였습니다. 1930년대부터 이곳에는 검열을 피해온 언론인, 문인, 학자, 종교인 등이 조용히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활동을 공식적으로 이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 지식의 끈을 이어..
혜화동 예수성심신학교, 일제의 감시 속 민족 교육의 거점이었던 성소의 공간 북촌 끝자락, 신학교의 침묵 속에서 피어난 의지서울 종로구 혜화동, 번화한 대학로와 낙산 사이에 자리한 예수성심신학교는 오랜 시간 동안 일반 시민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공간입니다. 지금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명칭 아래 조용히 기능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단순한 종교 교육시설을 넘어 서울 한복판에서 민족성과 지식의 맥을 이으려는 저항의 거점이자 교육의 최후 보루였습니다.이 학교는 1931년, 경성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노기량 주교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성직자 양성을 주목적으로 했지만, 시대 상황은 그 목적을 훨씬 더 넓게 만들었습니다. 신앙과 학문을 동시에 담아내는 공간이었던 예수성심신학교는 조선인 신학생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닌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