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숨은 역사 장소

혜화동 예수성심신학교, 일제의 감시 속 민족 교육의 거점이었던 성소의 공간

pokhari 2025. 7. 15. 18:52

북촌 끝자락, 신학교의 침묵 속에서 피어난 의지

서울 종로구 혜화동, 번화한 대학로와 낙산 사이에 자리한 예수성심신학교는 오랜 시간 동안 일반 시민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공간입니다. 지금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명칭 아래 조용히 기능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단순한 종교 교육시설을 넘어 서울 한복판에서 민족성과 지식의 맥을 이으려는 저항의 거점이자 교육의 최후 보루였습니다.

이 학교는 1931년, 경성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노기량 주교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성직자 양성을 주목적으로 했지만, 시대 상황은 그 목적을 훨씬 더 넓게 만들었습니다. 신앙과 학문을 동시에 담아내는 공간이었던 예수성심신학교는 조선인 신학생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닌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장소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망 속에서도 내면의 독립운동이 조용히 이어지던 지성의 성소였습니다.

 

일제의 감시 속 성소의 공간의 모습

 

일제의 감시와 억압 속에 세워진 학교

1930년대는 일제가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극대화하던 시기로, 종교 활동조차 철저한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가톨릭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성직자 양성소 또한 일본 당국의 사상 통제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성심신학교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비정치적, 비국가적 교육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곳에서 성서와 철학, 라틴어와 고전 교육, 민족의 역사와 문학까지 다루는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 조선 청년들에게 지식의 자양분이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신학 교육이라는 틀을 유지했지만, 그 안에는 시대를 통찰하는 힘과 현실을 해석하는 지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학교는 철저하게 폐쇄된 구조였으며, 외부인의 출입은 극히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일본의 간섭을 우회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고, 그 틈에서 신학생들은 시대와 민족의 현실을 공부하며 내면의 저항을 준비했습니다. 일제는 이를 눈치채고 지속적인 감시와 문서 검열, 교수진의 교체 요구 등을 시도했으나, 교구와 성직자들의 조직적인 보호 아래 신학교의 정체성은 끝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신학교가 품었던 ‘지식의 은밀한 통로’

예수성심신학교의 커리큘럼은 단지 성직자 양성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신학 및 철학서적이 라틴어 원문으로 반입되어, 이를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사상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신학생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 ‘정의와 불의의 본질’, ‘진실에 대한 신념’과 같은 주제 아래 교육을 받았고, 이는 일제의 통제 교육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가치였습니다.

더불어, 한국 고전 문학과 한문 교육도 병행되었으며, 일부 교수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사상을 신학과 연결해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표면상 신학 수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대를 꿰뚫는 ‘민족 지성’의 교육장이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었고, 학교 내부에서 토론과 글쓰기를 통해 지역성과 계층, 경험의 차이를 초월한 연대를 형성했습니다. 그 연대는 훗날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의 성직자 구조와 민중 목회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감춰진 독립운동 연계와 비공식 기록

공식적으로 예수성심신학교가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연결을 가졌다는 기록은 많지 않지만, 구술자료와 비공식 회고록, 해방 이후 교계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 후원’과 ‘지식적 연대’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신학교 출신 일부 인사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유지했으며, 인쇄자료 제작에 협조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이외에도, 학교 인근에 위치한 혜화동 성당은 당시 밀회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종교행사를 가장해 독립운동가와 신학생이 접선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일제는 신학교에 대한 불신이 점차 깊어졌고, 결국 경찰을 상주시켜 교육자료를 검열하거나 교수의 동향을 감시했지만, 그로 인해 학교는 더욱 ‘조용한 지성의 항전지’로 작동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습니다. 그는 이 학교의 후신 격인 성신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일제 말기의 억압과 해방의 혼란을 모두 겪은 인물입니다. 그의 신앙관과 사회참여 정신은 예수성심신학교의 교육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받으며, 이는 단지 종교를 넘어서 민중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라진 공간과 그 기억을 보존하는 과제

현재 예수성심신학교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학교는 1980년대 이후 경기도 고양시로 이전되었고, 옛 혜화동 캠퍼스는 낡은 성당 일부와 기념비, 작은 기도실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서울 도심의 마지막 ‘교육 성역’이자 ‘지식의 피난처’였던 이 공간은, 도시 재개발과 무관심 속에 조용히 잊히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서울시는 혜화동 일대의 근대문화자산에 대한 보존 작업을 일부 진행하고 있으나, 예수성심신학교는 아직 명확한 문화재 지정 대상도 아니고, 안내판 하나 없는 상태입니다. 도시의 기억에서 밀려난 이 공간은 여전히 많은 이야기와 정신을 품고 있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학교가 사라진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고, 성직자의 방이 있던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장소가 가진 의미까지 사라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리적 복원이 어렵다면,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고 시민들에게 그 기억을 전할 디지털 아카이브나 시민 프로그램, 상징적 기념 공간만이라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예수성심신학교의 의미

서울의 역사란 단지 왕조와 궁궐, 대규모 사건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 속 이름 없는 공간들, 조용한 장소들 속에서 지속된 정신과 지식의 흐름이 진짜 서울의 역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혜화동 예수성심신학교는 단순한 종교 교육기관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조용히 꿈꾸었던 ‘내면의 독립운동장’이자 ‘민족 지성의 비축소’로 재조명받아야 마땅합니다.

서울의 숨은 역사 장소로서 이 공간은 말이 아닌 침묵, 무력한 저항이 아닌 사유와 연대를 통해 시대를 버텨낸 공간입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이어진 교육, 그 교육이 일으킨 사상, 그리고 그 사상이 남긴 인물들까지. 지금 서울이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조용하지만 굳건했던 장소들입니다. 혜화동 신학교의 존재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단지 외형이 아닌 정신으로도 기억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