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산자락에 깃든 ‘지식인의 은둔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오패산은 오늘날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은 소박한 산입니다. 낙산과 북악산을 잇는 이 야트막한 산은,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아 도심 속 자연공간처럼 느껴지지만, 이곳은 과거 지식인과 예술인, 종교인들이 은밀히 모여 사유하고 창작하던 서울 지성사의 숨겨진 거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 오패산 자락은 단순한 은신처 그 이상이었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살짝 비껴난 성북동 일대는 행정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던 도시의 가장자리였습니다. 1930년대부터 이곳에는 검열을 피해온 언론인, 문인, 학자, 종교인 등이 조용히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활동을 공식적으로 이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 지식의 끈을 이어가기 위한 마지막 공간으로 이 지역을 택했던 것입니다.
성북동 일대는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외부의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지였고, 주변에 전통적인 한옥 마을과 개화기적 풍경이 공존하면서 사유와 창작이 가능한 ‘심리적 공간’이 조성되기에 적합했습니다. 오패산 자락의 고요함과 폐쇄성은 이들에게 일종의 보호막이었고,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 숨겨진 지성의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검열 속, 글과 사상이 살아 숨 쉬던 골짜기
1930년대 이후, 조선 지식계는 일본 제국의 사상 통제와 표현의 자유 탄압으로 거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특히 언론과 문학계는 ‘문장 하나로 구속될 수 있다’는 공포 아래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창작과 사유는 공식 공간이 아닌 비공식 네트워크와 은둔처에서 조용히 지속되었습니다. 오패산 자락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백석, 정지용, 김기림, 이상, 박태원 등은 이 일대를 자주 찾았으며, 일부는 실제로 성북동에 머물거나 창작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백석의 경우 성북동의 고즈넉한 산골짜기와 시골 마을 풍경에서 시적 감성을 되살려 ‘고향’과 ‘실향’이라는 주제를 확장시켰습니다. 이들이 오패산 자락에 모였던 이유는 단지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의 밀도를 유지하며 언어를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북동 일대에는 당시 일제의 감시가 비교적 약했던 개신교 선교 기반 학교나 성당, 유럽 유학생 출신 가정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집을 지식인들에게 빌려주거나 비공식적 창작과 번역 작업을 지원했습니다. 정지용의 번역 작업 일부, 김기림의 평론 메모 등은 이 지역에서 완성되었고, 그 기록 일부는 해방 이후 출판된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방기 격동 속 좌우 지식인이 공존했던 공간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성북동 오패산 자락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좌우 이념이 날카롭게 갈리는 가운데, 이 지역은 사상적으로 구속받지 않는 몇 안 되는 ‘중립적 공간’으로 남았습니다. 이곳에선 좌익 계열 지식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일정 부분 교류했으며, 공식 조직이 아닌 사적 친분과 지식의 연대를 중심으로 한 문화 네트워크가 작동했습니다.
당시 성북동에는 김용준, 최영숙, 김기림, 안회남 등 문화·철학계 인물들이 거주하거나 거쳐 갔으며, 그들의 가옥은 때로는 강연회, 때로는 토론회, 때로는 서클 모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이끈 모임은 정치적 구호보다 문화 자립, 한국 사상의 정립, 언어의 자율성 확보에 초점이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평가받는 해방기 ‘사상적 자율지대’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1946년 무렵, 일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과 개신교 신학자들 간의 비공식 대화도 이 일대에서 진행되었고, 이 교류는 이후 민중신학이나 진보적 민족주의 담론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처럼 오패산 자락은 정치적 이분법을 넘어서 지성의 공통분모가 실험되던 곳이었으며, 그 기록은 대부분 비공식적이지만 구술자료와 편지, 회고록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삶과 사유가 교차하던 장소, 문화사의 은밀한 기지
오패산이 단순한 자연경관이나 은신처를 넘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지식인의 실천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던 몇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성북동 일대는 당시 서울에서도 드물게 ‘지식과 생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한성대와 보문동, 창신동 시장과 연결되어 일상적 생활이 가능했고, 출판물이나 필기구, 문고 자료가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도 지하 유통망을 통해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지역에 가면 누구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는 오늘날로 치면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이뤘던 셈입니다. 글을 쓰기 위한 공간, 책을 읽기 위한 집, 대화를 나누기 위한 마당이 자연스럽게 구성되었고, 이 지역은 하나의 ‘비제도적 학문 공동체’처럼 작동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예술인들은 아예 이 지역을 예술촌으로 삼고 화실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응노, 장욱진, 이종무 등 일부 작가들은 이곳에서 드로잉 작업이나 목판화를 실험했으며, 후에 ‘성북 예술 동인’이라는 소모임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오패산 자락은 그런 점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이 교차하며 서로를 자극하던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풍경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기억들
현재 오패산 일대는 둘레길로 정비되었고, 일부 지역에는 근린공원과 공동주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예전 지식인 거주지 대부분은 철거되었으며, 이 지역이 서울의 지성사에서 가졌던 역할은 거의 기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는 ‘성북동 문화예술인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는 1970~80년대 예술가 거주 중심의 후대적 흐름이며, 일제강점기해방기 오패산 자락의 의미는 여전히 묻혀 있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고택, 정자, 세미나 공간, 비공식 서재 등은 더 이상 흔적조차 없고, 구술기록과 일부 유족들의 증언만이 이곳이 지식인의 은신처였음을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서울의 문화사와 지성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단지 기록된 사건과 인물만이 아니라, 그들이 숨 쉬고 머물렀던 공간까지 포함한 총체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서울이 가진 깊이란 단지 궁궐이나 성곽의 연대기만이 아니라, 생각이 오가고, 글이 태어나고, 사상이 실험되던 무형의 장소들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패산 자락은 그 무형의 장소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면서도 가장 풍부한 의미를 간직한 공간이었습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오패산 자락의 재발견
서울의 역사 속에서 오패산 자락은 ‘숨은 장소’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화려한 건축이나 거대한 사건이 아닌, 생각과 사유, 조용한 저항과 끊기지 않는 연대가 존재했던 곳. 서울 성북동 오패산은 그런 역사의 밀도를 품고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닌,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사적 네트워크이자 사회적 비판의 배후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패산은 물리적 장소 이상의 가치를 갖습니다. 지금 서울이 ‘지속가능한 기억’을 고민한다면, 반드시 이 장소의 과거를 기록하고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오패산 자락은 공적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더욱 소중한 기억의 공간입니다. 이 도시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살아 있는 역사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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