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으로 감춰진 병원의 터, 서울역 뒤편의 침묵
서울역을 지나 남쪽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 일대가 일제강점기 시절 중요한 의료·군사적 기능을 담당했던 지역이라는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관광객들이 바쁘게 이동하는 이곳 뒤편에는 과거 일본군 육군병원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도로와 평범한 건물들 사이에 특별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곳은 한때 식민지 권력의 의료 지배가 본격화되었던 장소였습니다. 특히 이곳은 단순한 치료 공간을 넘어, 일제의 군사력 유지와 병력 회복을 위한 핵심 인프라였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과 기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서울역 일대는 근대 도시계획의 중요한 일부로 편입되며 각종 행정과 운송, 통신망의 중심지로 정비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본 육군병원이 자리했던 후암동과 갈월동 일대는 도시의 변두리 같지만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전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군의료가 중시되던 당시, 이 지역에 세워진 병원은 단지 군인의 치료 공간을 넘어 식민지 한국의 보건과 위생 정책을 장악하기 위한 상징적 거점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 병원 건물은 철거되고, 주변 지형도 크게 변화하면서 그 존재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습니다.
일제의 군 의료 체계와 함께 도입된 병원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에 본격적으로 군사적 거점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요 도시마다 일본군 전용 병원이 건립되었고, 서울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시설이 들어선 곳이었습니다. 1906년을 전후해 일본군은 남산 아래 후암동 일대에 군 병원 부지를 확보하고 병력 수용, 치료, 방역 기능을 포함한 근대식 병원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병원은 단순한 외상 치료에 그치지 않고 전염병 예방, 정신질환 관리, 위생 검사 등 다방면의 업무를 수행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근대성 확산 도구로 활용됐습니다.
특히 일본군 병원은 군의 위계에 따라 의료의 우선권이 배분되었으며, 조선인 병사는 물론 조선인 민간인은 병원의 치료 대상에서 원칙적으로 제외되거나 차별적으로 다뤄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설 운용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구조 속에서 위계화된 생명 관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당시 병원 기록이나 군 보건 행정 자료를 보면, 일본인 군인 환자는 시설 내에서 우선적으로 진료받았고, 조선인 징용병이나 지원병의 경우에는 열악한 조건에서 치료가 이뤄졌다는 증언도 남아 있습니다.
병원 부지의 확장과 식민지 도시계획의 연동
서울역과 연결된 일본육군병원은 단일 건물로 시작했으나 이후 병동, 의무창, 감염병 격리동, 의무관숙소 등으로 확대되어 병원 단지를 형성했습니다. 이 병원 단지는 단순히 의학적 기능에 머무르지 않았고, 군사 거점으로서, 나아가 식민지 통치 체계의 일부로 작동했습니다. 특히 서울역과 병원은 철도망과 연계되었기에, 부상병 이송과 후송 체계를 빠르게 운용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또한 후암동 일대의 병원 부지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도시 정비 사업과 맞물려 도로 개설, 구획 조정, 철도 기반시설과의 통합 개발 등을 통해 점점 기능이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병원 부지가 아니라, 병원 도시 또는 전시 체제의 도심 요충지로서 기능하게 했습니다. 그에 따라 병원의 위치는 남산과 서울역, 총독부 관저, 일본인 거주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통치의 물리적 거점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이런 구조는 이후 해방 직전까지 유지되다가, 해방 이후 병원 운영이 중단되고 점차 시설이 철거되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해방 이후의 변화와 흔적의 지워짐
광복 이후 일본 육군병원 부지는 미군정 시기를 거치며 미군 관련 시설이나 국가기관의 용도로 일부 전환되었고, 이후에는 민간 주택단지와 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병원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현재 이 병원이 있던 곳은 정확한 건물 배치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으며, 그 자리에 병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도시 개발과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이 일대는 후암동 주택가와 서울역 후방 골목, 그리고 갈월동의 일부 지역으로 구분되어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안내판이나 표지석도 없는 상태이며, 서울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이 공간이 과거 어떤 역사적 기능을 수행했는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특히 도심의 다른 역사 공간들과는 달리, 일본군 병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민감한 상징성을 띠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이나 안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인과 의료 차별, 보이지 않는 권력의 작동
이 병원터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역사적 문제 중 하나는 ‘의료를 통한 식민지 지배’입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근대 의료 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면서도, 그 핵심은 철저히 일본인 우선 원칙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군 병원은 그 정점에 위치한 공간으로, 조선인에게는 제한적이고 차별적인 의료 서비스만 제공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생명을 관리하는 방식 그 자체로 식민 통치를 유지했던 구조였습니다.
더욱이 일본군 병원은 의학 연구와 실험의 공간이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나 피병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윤리적인 시술이나 실험도 이뤄졌다는 기록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전후 국제 재판이나 증언에서 일부 사례들이 언급되었지만, 한국 내에서는 이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기억의 단절은, 도시 공간 속에서 역사적 통찰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잊힌 장소를 기억하는 방식, 서울 도심의 공백 메우기
서울역 뒤편이라는 공간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교통 요충지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의 흐름이 끊임없는 공간 한가운데에도, 과거가 완전히 지워진 흔적들이 존재합니다. 일본 육군병원이 있었던 이 자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도시 풍경 속에서 어떤 층위의 과거가 지워지고 남겨졌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도시의 기억은 기록만으로 복원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흔적이 사라졌더라도, 그것을 되짚어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의 맥락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어야만 진정한 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역 뒤편을 지나는 이들은 그 자리에 병원이 있었음을 알지 못한 채 스쳐지나가지만, 우리가 그 장소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기억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은 단절된 역사에 다리를 놓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 육군병원터는 바로 그런 장소입니다. 도시의 중심이자 역사의 공백을 품은 침묵의 공간, 그 자리를 다시 바라보는 일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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