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숨은 역사 장소

장충단비, 사라진 제단의 그림자와 일제 식민 기억의 흔적

pokhari 2025. 7. 19. 22:35

한때의 충절이 사라진 자리, 그리고 남겨진 비석 하나

서울 중구 장충동 일대, 동국대학교와 국립극장이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평화로운 공간은 과거 수많은 이야기가 중첩된 역사적 장소입니다. 특히 이곳에는 1900년에 세워졌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제단이 있었고, 그 흔적으로 장충단비가 오늘날까지도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은 단순한 기념물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제국주의적 기념공간, 민족 기억의 왜곡, 그리고 식민권력이 공간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이용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현재 장충단이라는 이름은 공연장이나 공원의 이름으로만 명맥을 유지할 뿐, 그 실제 역사적 맥락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장충단의 설치는 조선 말기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명성황후와 이로 인한 갑오·을미사변의 여파 속에서 충절을 기리는 의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을미사변 당시 목숨을 걸고 국모를 지키려다 전사한 이들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1900년 장충단을 세웠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령단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제례를 지냈던 공식적인 충신제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은 조선이 망한 뒤 일제에 의해 본래의 제의 기능을 박탈당하고, 20세기 중엽까지 철저히 왜곡된 방향으로 재편되며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갔습니다.

 

국가 제단에서 일본 제국의 공원으로, 장충단의 식민지화 과정

장충단은 처음에는 을미사변으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지만, 일제가 조선을 식민화하면서부터 그 의미는 빠르게 변질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억누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기존의 기념 공간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왜곡해버리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장충단 역시 그 대상이 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제단 자체가 철거되거나 그 기능을 상실한 채 장충단공원이라는 이름의 유원지로 바뀌게 됩니다.

이 장충단공원은 일제에 의해 서양식 정원과 유희공간으로 탈바꿈되었고, 본래의 제단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처럼 보이는 기념비와 정자, 연못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즉, 조선의 충절을 기리던 공간이 이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사업과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물리적 철거나 공원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고, 공간에 담긴 역사적 의미 자체를 지워버리는 식민 권력의 상징적 조작이었습니다.

 

서을 숨은 역사 장소에서 보는 일제 식민 기억의 흔적

 

장충단비, 사라진 제단을 기억하는 유일한 흔적

오늘날 이 일대에서 장충단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유일한 흔적은 바로 장충단비입니다. 이 비석은 1900년에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을미사변 당시 충신으로 분류된 인물들의 이름과 이들을 기리기 위한 고종의 어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 3.7미터, 폭 1.3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석비로, 비문의 서체는 명필로 유명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환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충단비는 단순한 표지물이 아니라 국가적 위령의 상징으로, 조선 후기 유교적 충절관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교차지점에서 세워진 기념비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장충단은 해체되었고, 장충단비만 홀로 남아 변형된 공원의 한켠에 방치된 채 존재해왔습니다. 이 비석은 1969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서울 중구 동국대학교 정문 인근에 자리하고 있지만, 비석의 역사적 맥락이나 의미에 대한 안내는 매우 부족한 실정입니다.

 

장충단터, 사라진 장소의 복원을 위한 기억의 실마리

서울 도심의 수많은 기념물과 달리, 장충단터는 그 존재가 거의 지워진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제례가 거행되었고, 을미의병의 출병지로 활용된 기록도 있으며, 나라의 충절을 기리는 공식 제단으로 존재했던 이 공간은 이제 공원, 공연장, 호텔 등이 들어선 복잡한 도심공간으로 재편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공간이 반드시 망각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장충단터는 물리적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의 지도, 문헌 기록, 고종의 어명, 장충단비와 같은 물적 증거를 바탕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오늘날 도시 재생의 흐름에서 ‘사라진 공간의 복원’은 꼭 건축물 복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충단터처럼 현재는 사라졌지만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내고, 시민의 기억과 연결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원의 시작입니다. 장충단터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수집하고, 현재 공간의 구조와 비교해 유적 표기나 디지털 복원 콘텐츠를 마련하는 등의 시도는 충분히 가능한 접근이며, 앞으로의 도시문화 기획에서도 유효한 방향입니다.

 

식민지 기념 공간이 된 장충단공원의 전후사

해방 이후 장충단 일대는 또다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장충단공원이라는 이름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해방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의 공간 구조가 상당 부분 유지되었고, 이 공원은 서울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장충단비는 간신히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이 비석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거의 잊혀졌고, 공원 내부에 있던 식민지 유산이나 일제식 구조물은 오랫동안 철거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이후, 장충단 일대에는 국립극장, 신라호텔, 장충체육관 등이 들어서며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근대사 속 공간이 갖는 기억의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장충단은 이제 과거의 이름으로만 남았으며, 그 안에 담긴 역사성과 상징성은 일부 전문가나 연구자들의 논문 속에나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장충단비는 단순한 석비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를 거쳐 복잡하게 뒤틀린 한국 근현대 기억의 상징이자, 사라진 제단을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로 기능합니다.

 

기억의 복원, 역사 공간에 대한 시민적 감각의 회복

장충단과 장충단비를 되살리는 일은 단지 과거의 흔적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역사와 공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단순히 관광자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품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시민이 함께 공유하고, 공간이 지닌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특히 장충단은 왕정 말기의 혼란, 충절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제례, 식민지 시기의 기억 왜곡, 해방 이후의 재편 등 한국 근현대사의 다양한 단면이 교차된 상징적 공간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러한 공간은 우리가 어떤 사회적 기억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해주며, 동시에 사라진 장소를 기록하고 복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를 환기시켜줍니다. 장충단터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의 서울 도시사 연구는 물론, 공공기억의 정립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