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구석에서 만나는 낯선 이름, 광희문
서울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 어귀, 퇴계로를 따라 걸으면 어쩐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작은 성문 하나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높지도 않고 크지도 않으며, 유명 관광지도 아닌 이 문은 바로 ‘광희문(光熙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복궁, 창덕궁, 남산, 또는 서울성곽 하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광희문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여덟 개 문 중 하나로, 엄연히 국가의 공식 시설이었고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던 문입니다. 지금은 소외된 역사 공간이지만, 이곳은 조선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였으며, 때로는 죽음과 외국의 경계를 넘나드는 민감한 장소로 존재해왔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광희문이 왜 존재했고, 지금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그 모든 맥락을 복원해보려 합니다.
한양 도성의 여덟 개 문 중 ‘문’으로 불리지 못한 문
조선은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도성을 쌓았습니다. 그 도성에는 출입을 위한 네 개의 대문과 네 개의 소문이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숙정문(북대문), 돈의문(서대문)이 사대문이고, 소위 사소문은 소의문, 혜화문, 창의문, 그리고 광희문입니다. 광희문은 정동 방향인 소의문과 함께 서남쪽 도성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유독 ‘문(門)’보다는 ‘개(開)’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렸습니다. 옛 문헌에서는 광희문을 ‘시구문(屍柩門)’ 또는 ‘시문(屍門)’이라 불렀고, 실제로는 '광희개(光熙開)'라는 표기로 쓰였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는 광희문이 가진 독특한 기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대문이나 다른 소문들과 달리, 광희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넘기던 길, 시구문으로서의 광희문
광희문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운구할 때 사용된 문입니다. 유교적 관념에 따라, 수도 한양 안에서는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하면 시신을 되도록 빨리 성 밖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산 자의 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을 엄격히 구분했던 전통 속에서 광희문은 한양 도성에서 시신이 빠져나가는 통로, 즉 ‘시구문’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특히 광희문은 동남쪽 방면, 즉 지금의 왕십리와 동대문, 중랑천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당시의 공동묘지나 매장지와도 가까웠습니다. 흥미롭게도 광희문을 통해 나간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고인’이었고, 따라서 그 출입은 살아 있는 사람의 통행과는 구분되어야 했습니다. 광희문이 다른 문과는 달리 성문 위에 누각이 없는 것도, 이 문이 상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비통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의 장소’였기에 지워진 문
광희문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시신 운반의 출입문으로 존재해왔지만, 기록과 지도에서는 자주 생략되거나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서울 지도에서도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은 항상 정위치에 표기된 반면, 광희문은 누락되거나 ‘시구문’이라는 표기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부정한 공간’으로 인식된 결과였습니다. 유교 문화권에서 죽음은 음적인 기운으로, 성스러운 도성과 함께 있기엔 불길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결과 광희문은 점차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조선 후기 이후에는 기능도 축소되고 존재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는 도로 확장과 도시 재편 과정에서 성벽이 헐리고 문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광희문도 완전히 사라질 뻔했습니다. 다행히 일부 석재와 기초 구조물이 남아 있었고, 해방 후 1975년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외국 사신과 전염병, 광희문을 거쳐 지나간 또 다른 존재들
광희문이 시신 운반의 통로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문이 조선과 외국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외국 사신이 입국하거나,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격리와 통제를 위해 도시 외곽을 따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희문은 이런 기능에도 활용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입경할 때, 수모를 줄이기 위해 성문을 이용하지 않고 광희문이나 성벽 사이의 임시 개구부를 통해 입성한 사례가 있었고, 19세기 후반 콜레라와 두창 등 전염병이 퍼질 때는 광희문 인근에 격리 공간이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즉 광희문은 단지 죽은 자를 위한 문이 아니라, ‘정상적인 한양 시민의 출입 경로’ 바깥에 존재하는 비상 상황과 예외를 담당하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광희문이 당시 도시의 질서와 경계를 관리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광희문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현재 광희문은 퇴계로6가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높은 빌딩과 상가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은 모습은 도심의 다른 유적들과는 다르게 다소 쓸쓸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광희문의 역사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관광객이 몰리는 다른 대형 유적들과 달리, 이곳은 일상의 틈에서 만나는 잊힌 공간이며,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의 도시 계획과 사상적 질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입니다. 광희문 앞에는 간단한 안내판과 석축이 있으며, 문 자체는 복원된 구조이지만 원래 석재 일부가 활용되어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민들 대부분은 이 문을 그냥 지나치지만, 그 아래 서서 잠시 멈춰선다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어두운 경계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서울 도심에 남은 몇 안 되는 성문 유적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와 개발을 거치면서 성문과 성벽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성곽은 도심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 확장, 철거, 재건축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숭례문과 흥인지문, 창의문 등 일부만이 유적으로 보존되었으며, 광희문은 아예 잊힐 뻔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광희문을 포함한 서울 성곽의 남은 흔적들이 역사적 가치와 도시 정체성 회복의 실마리로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광희문은 비록 작고 조용하지만, 오히려 그 특유의 기능성과 도시 변두리의 상징성 덕분에 ‘서울 숨은 역사 장소’라는 타이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유산입니다.
우리가 광희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광희문은 조선시대 한양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로였으며, 동시에 죽음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기능적 경계였습니다. 비록 그 크기나 화려함은 크지 않지만, 이 문 하나에 담긴 의미는 상징적으로 매우 큽니다. 광희문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장소가 어떻게 한 도시의 정신과 사상을 담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는 화려하지 않고 유명하지 않지만 한 시대의 정신과 규범을 상징했던 공간들을 새롭게 주목할 수 있습니다. 광희문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사상, 도시 구조, 삶과 죽음의 태도가 응축된 이 작은 문은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잇는 또 하나의 문을 열어줍니다.
광희문 방문 정보
-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6가 323-1
- 지하철: 2, 4,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 도보 약 5분
- 관람료: 무료
- 운영시간: 제한 없음 (야간 조명 없음)
- 주변 탐방지: 서울성곽길 남산구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약현성당, 남산골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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