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숨은 역사 장소

동망봉, 조선의 서울 감시망이 시작된 봉수대

pokhari 2025. 7. 12. 08:31

감춰진 서울의 시작점, 동망봉이라는 이름의 의미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과 휘경동 사이, 흔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언덕 하나가 있습니다. 높지도 않고, 별다른 표지판도 없으며, 일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조차 그 이름이 생소할 수 있는 이곳은 바로 ‘동망봉(東望峰)’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야산이 아닙니다. 조선 시대, 이곳은 서울 도성 바깥을 감시하고, 전국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보를 가장 먼저 확인하던 봉수대이자, 군사 감시소였습니다.

‘동망봉’이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내부와 외부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도시 구조였으며, 외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동망봉은 한양 도성의 동쪽 바깥에 위치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조기에 파악하고, 내부로 신속히 전달하는 경계의 최전선이었습니다.

동망봉은 공식적인 행정 구역의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지리적으로는 동대문, 성북, 중랑, 노원 일대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고지였습니다. 이곳에서의 관측은 단순히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화재, 민란, 외적 침입 등 수도를 위협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빠르게 인지하고 조치하기 위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남산이나 북악산의 봉수대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동망봉은 이들보다 앞서 신호를 포착하고 전달했던 서울 감시 시스템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동망봉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도시의 뒷동산처럼 남아 있어,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의 가치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곳입니다.

 

서울 감시 시스템의 모습

 

봉수 체계에서 동망봉이 차지한 결정적 위치

조선의 봉수제(烽燧制)는 전국적인 통신 시스템이자 감시 체계였습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전달하던 방식으로, 특히 긴급 상황에서 중앙 정부에 신속히 상황을 전달하는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의 봉수대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정보를 중계했는데, 이 루트의 서울 최종 수신지 중 하나가 바로 동망봉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해안 강릉이나 삼척에서 왜구나 해적의 침입이 감지되면, 각 지역의 봉수대들이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냈고, 이 신호는 속초-홍천-가평-포천을 거쳐 노원구 화랑봉을 지나 동망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동망봉은 남산 봉수대로 연결되어 왕궁까지 긴급 상황을 알리는 최종 경로를 담당했습니다.

특히 동망봉은 동북방 방향의 통신 중간 허브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연기 신호 전달을 넘어서, 감시 인력의 배치와 경계 태세 유지에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조선은 유사시 국경에서부터 서울까지의 봉수가 하루 안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동망봉은 그 구조상 마지막 경계선이자 통신 체계의 완결점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이 봉수 체계는 전면 폐지되었고, 동망봉 역시 감시 기능을 상실한 채 야산으로 방치되었습니다. 일부 기록은 남아 있으나, 실제 유적의 대부분은 도시 개발로 인해 사라졌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동망봉은 서울의 공식 역사 콘텐츠에서조차 자주 배제되는 안타까운 장소입니다.

 

일제강점기와 전후 개발이 만든 잊혀진 감시 공간

일제강점기 이후 동망봉은 전략적 감시소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일본은 조선의 봉수 및 군사 체계를 철저히 해체했고, 이 지역을 단순히 도시 외곽의 녹지 공간으로 전환했습니다. 더 나아가 해방 이후의 도시 확장 과정에서 동망봉은 급격히 사라져가는 역사 공간이 되었습니다.

1960~1980년대 서울 동북부의 급속한 도시화는 이문동, 휘경동 일대의 산지들을 개발 대상지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봉수대나 감시소 유적에 대한 보존 의식이 거의 없었고, 동망봉 일대 역시 학교, 아파트 단지, 도로 건설을 위해 자연스럽게 깎이고 축소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망봉 봉수대가 있었던 구체적인 위치조차 명확히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몇몇 연구자들은 동망봉의 원래 위치를 이문동 한성대학교 후문 인근으로 추정하지만, 해당 지점은 이미 여러 차례 개발이 이루어진 상태여서 고고학적 복원이나 발굴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나마 봉수 관련 기록이 일부 남아 있어, 문헌으로 당시의 기능을 유추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망봉은 서울 시민의 일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근처 주민들조차도 이곳이 봉수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등산객이나 산책객에게도 그저 도시 외곽의 언덕 정도로 여겨지는 현실은, 역사적 장소로서의 회복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인 원인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동망봉의 흔적과 재조명의 가능성

지금의 동망봉은 서울의 격자화된 도시 구조 속에 묻혀 있지만, 여전히 지형적 특징을 통해 그 흔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동대문구 이문동과 휘경동 사이, 한성대와 경희대, 외대 캠퍼스를 잇는 언덕 지형은 조선 시대부터 감시·통신의 고지로 활용되던 장소입니다.

최근에는 역사교육 콘텐츠를 중심으로 봉수대 복원과 유적 재조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서울시나 동대문구청 차원에서는 ‘도시 속 사라진 봉수대’ 콘텐츠를 개발하거나, 유사 장소에 안내 표지판과 기록물 전시 공간을 설치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또한, 동망봉 일대는 교육기관이 밀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지역 기반 역사 체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큽니다. 경희대, 한국외대, 한성대 등 주요 대학들이 가까이에 있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수 통신 체험 프로그램이나 지역 연계 답사 교육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동망봉을 단순한 과거의 잔재가 아닌, 서울 시민들이 도심 속에서 잃어버린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되살리는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복원만이 아니라, 공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시민의 감수성 속에 스며들도록 만드는 일이 앞으로의 핵심 과제가 될 것입니다.

 

‘서울의 경계’로서 동망봉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

동망봉은 단순히 서울 외곽의 작은 언덕이 아니라, 조선 시대 ‘서울의 경계’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장소입니다. 도성 내부를 중심으로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시하고, 필요한 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 통신 체계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한양 도성의 4대문이 행정적·군사적 중심이었다면, 동망봉은 그 경계를 넘어서 도성 바깥까지 감시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강 이북, 강원도, 함경도 방면의 접근로를 실시간으로 주시하고, 서울로 들어오는 첫 번째 정보망을 형성한 이곳은 한양의 안정성과 왕권 유지에 있어서 결코 부차적인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동망봉은 시간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철저한 봉수 체계의 일원으로 기능했고, 후기에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국가 통치 체계 속에서 점차 주변화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진 감시의 장소이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기억의 공간으로서 그 가치를 지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망봉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통치되고 지켜졌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오늘날 이곳이 다시 조명된다면, 우리는 서울의 공간 구조와 정체성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