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숨은 역사 장소

광희문, 질병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도성의 출입구

pokhari 2025. 7. 13. 10:44

광희문은 왜 ‘질병과 죽음의 문’이었는가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인근, 비교적 한적한 도로변에 자리한 작은 석문 하나가 있습니다. 이름은 광희문(光熙門). 외형만 보면 남대문이나 동대문 같은 위용은 없고, 규모도 한참 작지만, 이 문이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맡았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광희문은 흔히 ‘소문(小門)’이라고 불렸던 도성의 부속 문 중 하나로, 본래 동남쪽 성곽 일부에 설치된 보조 출입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질병과 죽음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 기능했습니다.

조선은 질병, 특히 전염병에 대해 매우 엄격한 통제 정책을 운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환자와 시신의 도성 내 체류는 금지 대상이었으며, 반드시 도성 밖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광희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환자 수송로, 시신 반출로, 그리고 감염자 통행로로 활용되며, 도성 내부와 외부 사이의 ‘위험 요소’를 관리하는 경계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광희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조선 사회의 생명관리 체계가 응축된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동대문과 연결된 보조 출입구의 전략적 배치

광희문은 동대문(흥인지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성 구간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성문 중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세종 4년(1422년)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한양 도성의 방어 기능이 강화되면서, 주요 성문 외에도 특정 용도의 통로가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광희문은 동대문에서 멀지 않은 거리이면서도, 바로 인근에 보제원과 시신 처리장, 공동묘지, 제생원 등 조선의 구휼·의료 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지점과 연결되어 있어 그 역할이 특별했습니다.

광희문은 일반 백성의 일상 통행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감염병이 발생하거나 무연고자의 사망 시, 보제원에서 시신을 실은 수레가 이 문을 지나 외곽 매장지로 향하던 주요 경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염병 유행기에는 감염자 가족이나 격리 대상자들도 이 문을 통해 도성 외곽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도시의 ‘출구’이면서 동시에 조선의 생명경계, 질병관리, 통제 시스템의 실질적 운영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질병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도성의 출입구의 모습

 

질병과 도시질서 사이에서 조율된 경계

광희문을 중심으로 한 도성 외곽 공간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해서 보건과 위생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보면, 역병이 돌던 시기에 광희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환자와 시신 수송의 장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때 왕실은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철저한 격리와 통제를 명령했고, 성문 근처에는 임시 격리소나 화장 공간이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광희문은 조선이 질병과 도시 질서를 어떻게 분리하고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감염자나 시신이 도성 내부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공간적 정책은, 도심 거주자의 불안을 줄이고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감염자에 대한 배제와 분리를 제도화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광희문은 그런 의미에서 조선 사회의 방역과 복지 사이에 놓인 복잡한 윤리적 긴장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현대 개발 속에서 사라졌던 의미

일제강점기에는 광희문 일대가 군사 시설과 경성시 외곽 인프라의 확장 거점으로 재편되면서, 이 문은 사실상 ‘기억에서 사라진 문’이 되었습니다. 도로 확장, 철도 부설, 장충단공원 조성 등 도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광희문은 구조물 자체는 보존되었지만 기능과 상징성은 점차 흐려졌습니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도로변 조경물 정도로 취급되며, 시민들도 이곳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라는 인식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1983년에 이르러서야 광희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며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2012년에는 현재의 위치에 재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광희문에 대한 안내와 역사적 해석은 부족한 편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이 문을 단순히 ‘성곽길의 일부’ 혹은 ‘작은 성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조선의 방역과 구휼 체계의 중요한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광희문 일대가 보여주는 조선의 도시계획 철학

흥미로운 점은, 광희문과 보제원, 제생원 등 조선의 구휼시설들이 하나의 권역처럼 배치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조선의 도시계획이 단지 정치·행정의 효율성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질병·가난·죽음이라는 사회적 사각지대를 어떻게 공간적으로 통제하고 감싸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광희문은 도성 내에서 감염이나 혼란을 차단하면서도, 그 경계선 바깥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려는 조선의 공간적 인도주의의 결정체였습니다.

광희문이 보제원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시신을 도성 안에 둘 수 없다는 원칙, 감염병은 빠르게 외곽에서 격리·처리해야 한다는 위생 철학, 그리고 가난한 자라도 최소한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정치 이념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이처럼 광희문 일대는 도성의 생존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리적 지점이었습니다.

 

광희문, ‘숨은 문’에서 ‘기억의 문’으로

오늘날의 광희문은 규모도 작고, 관광지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이라는 도시국가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와 위험 요소를 바라보았는지를 상징하는 매우 독특한 장소입니다. 도성의 화려한 정문 뒤에 감춰졌던 이 ‘소문(小門)’은, 역설적으로 조선이 백성을 어떻게 통치하고 배려했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인도적인 문이었습니다.

서울은 곳곳에 도성의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기능까지 기억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광희문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 공간의 역사성과 사람의 기억을 함께 보존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문이 지나온 수백 년 동안, 그 아래를 지나간 수많은 생명들과 그 이면의 역사적 선택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비로소 광희문은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