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뒤편, 서대문형무소 자락에 숨겨진 장소들
경희궁 너머,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 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경희궁은 여러 궁궐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곳입니다. 조선 후기 궁궐이었던 이곳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던 공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은 다른 궁궐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 이 경희궁 뒤편, 곧 서대문 일대로 넘어가면 서울 시민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역사적 장소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가 조성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공간 중 하나로 변모하였고, 이후에도 도시 개발 과정에서 잊혀지거나 훼손된 수많은 장소들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공원과 기념관, 아파트 단지 등으로 바뀌었지만, 그 아래에는 독립운동과 투쟁, 억압과 수용, 저항과 기록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단순한 기억의 공간이 아닌,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경희궁의 후원과 연결되었던 서대문 일대
조선시대의 궁궐은 단순히 담장 안의 공간만으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후원과 자연지형까지 포함해 하나의 왕실 공간으로 계획되었고, 경희궁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경희궁의 서쪽은 지금의 서대문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궁궐의 생활과 의례에 필요한 자원과 시설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지금의 독립문 일대에는 경희궁에서 나오는 왕실 사발 및 제사용 물품을 보관하던 장고(藏庫)와 보급로가 연결되어 있었으며, 궁궐의 배후를 지탱하는 후방 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이 지역은 빠르게 군사적, 치안적 공간으로 재편됩니다. 경희궁 역시 대부분 철거되어 일본식 관공서나 학교 건물로 바뀌었고, 궁궐과 그 배후 공간 사이의 역사적 연결은 사실상 단절되었습니다. 이 단절은 곧 도시의 기억에서 지워진 경계선을 의미합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조성과 그 주변의 변화
1908년, 대한제국 말기이자 일제의 영향력이 깊어지던 시기,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서대문형무소가 문을 엽니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본격적으로 확장되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기관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고, 고문과 사망, 사형이 이어지며 조선의 저항정신이 짓눌리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 지역 또한 형무소의 기능에 맞춰 철저히 통제된 공간으로 변해갔습니다. 지금은 주거지로 알려진 독립문역 부근과 영천시장 일대는 당시 죄수 이송로, 감시시설, 사병 숙소 등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1930년대 지적도와 일본군 군사 문서를 보면 이 일대는 민간 접근이 극히 제한된 일종의 ‘치안 통제 지대’로 설정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형무소 후문에서 연결된 일부 길목은 오늘날까지도 미묘하게 공간 구조가 비어 있거나 곡선으로 꺾여 있으며, 이는 당시의 통제 경로가 지금까지도 도시 구조에 잔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제강점기의 근대 시설과 숨겨진 유적지
서대문형무소 주변에는 당시 일본이 설치한 다양한 부속 시설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형무소 서쪽 언덕에는 ‘서대문 병참지구대’가 있었고, 감시탑, 탄약고, 교도관 주택 등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영천시장과 충정로 일대 골목에는 일제의 군수 물자 보관소와 인력 숙소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 시기, 한국전쟁, 군사정권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재편되었습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기존의 시설들이 철거되고 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지며 과거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지형이나 도로 형태는 과거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컨대 현재 ‘독립문 어린이공원’ 일대의 지형은 원래 형무소의 내부 수용소와 후방 감시탑이 있던 곳이었으며, 지금도 밤에 보면 특이하게 낮은 담벼락과 사각형 대지들이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소는 따로 표지판이 없기 때문에 시민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남은 공간들
서대문형무소 안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그들의 고문과 저항, 순국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흔적은 형무소 내부뿐 아니라, 그 바깥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대문 독립공원’ 내부의 나무 한 그루, 돌담 하나에도 구금 당시의 나무 그늘이나 감시초소 기초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고, 형무소 서편 골목 안쪽에는 과거 형무소로 음식을 전달하던 조리공간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형무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 생존 독립운동가들이 한동안 임시로 거주하던 ‘해방촌형 임시주택지’ 역시 지금의 충정로 3가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으며, 일부 건물은 아직도 당시의 구조를 유지한 채 재건축되지 않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서대문형무소라는 공간은 감옥이라는 틀에 갇힌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까지 퍼져 있는 저항과 회복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도시화 속에서 지워진 장소들의 흔적
서울은 고도 압축 성장 과정에서 근현대사 유산을 대거 철거하거나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도시계획을 진행해왔습니다. 서대문 일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서대문형무소가 수형시설로서 기능을 멈춘 이후, 해당 지역은 도시계획 대상지로 지정되어 아파트 단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형무소 외곽의 부속건물들, 수용소, 보안시설 등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그 위에 새로 세워진 건물들에는 이전의 흔적을 전혀 알 수 있는 표지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남은 공간은 원래 부지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되거나 중요한 일이 벌어졌던 구역은 대부분 시가지로 전환되어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기억의 복원’은 단순히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속에서 역사적 장소를 체감할 수 있도록 연결하고 설명해주는 일입니다.
시민의 일상 속에서 다시 꺼내야 할 역사
오늘날 경희궁 뒤편과 서대문 일대는 아파트 단지, 학원가, 시장 등이 혼재된 서울의 전형적인 생활 공간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공간은 서울 근현대사의 핵심 장소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도시의 골목길, 낡은 담벼락, 불규칙한 지형, 옛 담장 옆으로 휘어진 길목 하나하나에 그 시절의 기억이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의 시선에서 이러한 기억을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도록 구성된 공간은 매우 부족한 실정입니다.
경희궁 뒤편과 서대문형무소 자락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닙니다. 여기는 한국의 독립, 저항, 회복, 그리고 망각이 함께 얽혀 있는 도시의 다층적 기억이 켜켜이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서울이란 도시가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있어, 이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은 그 근간이 되는 흐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 공간은 ‘기념비적’ 유산으로만 남아 있고, 일상 속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숨은 역사 장소란 단순히 알려지지 않은 유물이나 건축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에 묻혀버린 역사, 기억에서 지워지는 장소를 되살려내는 시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