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진과 구 이태원 철도 역사, 군사·교통의 교차점이 된 서울의 변두리
오늘의 서울에서 사라진 경계선, 이태원 철길의 흔적
서울 용산구 한강진과 이태원 일대는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 외국인 거리, 문화예술 공간으로 잘 알려진 지역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기지와 철도, 검문소가 맞물려 있던 도시의 경계 지대였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이태원 철길’로 불리는 미군기지 연결용 철도 노선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취를 감췄지만, 이 노선은 용산역에서 출발해 한강진과 이태원을 지나 경리단길 인근까지 이어지던 협궤 철로로, 미군 물자 수송을 위한 전략적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한강진 부근은 군용 차량이 지나다니는 군사도로와 철로가 겹치는 서울 내 보기 드문 구조였으며, 주민과 군인의 삶이 교차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철로가 지나던 자리, 한강진의 시간은 어디에 남았을까
‘한강진’이라는 지명은 지금은 지하철 6호선 역 이름으로만 익숙하지만, 실제로 이곳은 한강에서 가까운 진입로(나루터 진입 지점)라는 의미에서 유래됐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물자와 인력이 강을 따라 드나들던 물류 기지였고, 일제강점기 이후엔 군사 목적의 철도 기지로 재편됐습니다.
이 부근은 용산역에서 출발한 미군기지 전용 화물 철도가 지나던 핵심 구간이었는데, 1950~1980년대까지도 열차가 하루 수차례 오갔습니다. 정식 역사(驛舍)는 없었지만, 군수 철로의 분기점 역할을 했으며, 한강 북단과 미군 보급기지를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기능했습니다.
이 철로는 공식적인 지하철 노선이나 여객 노선이 아니었기에, 서울 시민 대다수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사진이나 지도상에도 희미하게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을 오랫동안 지켜본 원주민들에게는 어릴 적 철길 옆 놀이터, 미군 병사들이 지나던 길, 미군 트럭과 철도 신호기 등이 일상의 일부였습니다.
미군기지 철도와 이태원, 분단 이후 도시의 이면
이태원과 한강진 일대는 광복 후 한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던 지역이었습니다. 용산에 주둔한 미8군 사령부와 캠프 험프리스(이전엔 캠프 코이너)를 중심으로 철조망이 설치됐고, 기지 물자와 병력이 오가던 전용 철로도 이 구간을 통과했습니다.
이 노선은 용산역에서 분기돼 이태원로 아래로 이어졌고, 구 한남동까지 철로가 연장되어 있었으며, 군수 물자 운송을 위해 미군이 직접 관리하던 철도 구간이었습니다. 서울 안에서 자국 군이 자국 철로를 운영하는 구조는 이례적인 일이었고,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랜 시간 ‘서울 속의 외국’처럼 분리된 공간으로 남게 됩니다.
이 철로는 이후 한강진 철로 구간, 구 이태원 철로, 한남동 철도연결망 등으로 불리며, 일부 구간은 아스팔트 아래에 매립되고, 일부는 철거되어 도시 개발에 흡수됩니다. 하지만 오래된 상가 건물 벽면, 도로변의 이상한 곡선, 이면도로의 구조물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철길이 남긴 도시 경관의 기묘한 단서들
이태원 로데오 거리에서 한강진 방면으로 내려가다 보면, 한강진역 1번 출구 부근에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휘어지는 도로 구조, 건물 사이에 남겨진 좁은 빈 공간, 의미 없이 뚫린 터널형 지하차도 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과거 철도가 지나던 흔적을 따라 형성된 도시의 자국입니다.
특히 한강진~이태원 구간은 철길 곡선 반경이 좁았기 때문에, 그 위를 지나가던 협궤 열차가 천천히 움직여야 했고, 주변 건물 역시 열차 진동을 피하기 위해 철도 경계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지어졌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이상하게 휜 블록 구조, 도로 한가운데 남은 넓은 보도, 목적을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구조물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군사와 철도의 도시 인프라가 시민 일상 속에 남긴 유산입니다. 철도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도시 구조에 남아 있고, 우리는 이를 통해 과거를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문화의 길이 된 미군 철로, 경리단과 이태원의 변모
2000년대 이후, 미군기지 축소와 함께 이 지역은 빠르게 재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철길이 지나던 자리였던 경리단길과 이태원 경계선은 외국인 주택가, 디자인 숍, 수제 맥주 바 등이 들어서며 ‘서울 속 세계문화 거리’로 재탄생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거리의 중심이 과거 철로였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단순한 골목길이라 생각하는 이태원 경리단 일대의 곡선길은, 실제로는 철로 변에서 시작된 도시재생의 흔적이며, 철도 기반 도시 확장의 또 다른 결과입니다.
오늘날은 도시철도 대신 문화예술이 흐르는 이 길은, 한때는 검문소와 철조망, 미군 군수물자가 오가던 곳이었고, 지금도 몇몇 골목 벽에는 철로 흔적을 알리는 표지판이나 당시 구조물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 숨은 역사 장소로서 이태원 철도의 가치
서울은 철도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도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도는 여객 운송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군사 목적의 미군기지 전용 철도처럼 특수한 기능을 가진 철도는 기록이 부족한 편입니다. 이태원과 한강진 일대의 철로는 단순한 여객용 철도가 아니라 군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군사 철도였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통제구역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철도는 일반적인 지상 철도와 달리 많은 구간이 도시 개발 과정에서 매립되거나 사라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이곳이 단순한 골목길이 아니라 서울의 도시사와 군사사가 교차하는 의미 있는 역사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특성은 지금의 서울이 과거를 어떻게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 흔적을 지우며 확장해왔는지를 말없이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공간은 단순한 골목이 아니라, 서울의 도시 기억이 스며 있는 역사 장소로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직접 걸어보는 철로 위 서울
지금도 걷기 좋은 서울 숨은 길을 찾는다면, 한강진~이태원~경리단으로 이어지는 철길 흔적 따라 걷기를 추천합니다.
- 출발: 한강진역 1번 출구
- 중간: 이태원로 곡선 도로, 구 철도터널 구조물
- 도착: 경리단길 정상부, 구 철길 기반 가로 구조
이 구간은 특히 도심과 외국문화, 역사와 현대가 뒤섞인 구조라서 탐방의 밀도가 높습니다. 사진 촬영 포인트도 많고, 철도 흔적과 벽화, 상점의 이름 등에도 과거 지명의 조각이 남아 있어 작지만 흥미로운 발견이 가능합니다.
철로는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남아 있다
서울의 역사 장소는 거창한 문화재나 화려한 유적지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걷다 보면 스쳐 지나치는 골목, 이상한 도로 곡선, 낯선 구조물이 숨은 이야기의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이태원과 한강진 일대의 옛 철도 흔적은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군사와 철도가 서울 속에서 만났고, 그것이 다시 문화와 시민 공간으로 재구성되면서 지금의 이태원과 한강진이 탄생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잊힌 역사를 기억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도시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탐방 정보
- 위치: 서울 용산구 한강진역~이태원역 일대
- 대중교통: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 이태원역
- 추천 시간: 낮 2시~5시 사이 골목 탐방
- 지도 확인 팁: 오래된 지도에서 ‘캠프 코이너’, ‘이태원 군사철로’ 등으로 검색
- 주변 연계: 경리단길, 녹사평역, 남산순환로까지 연계 가능